회사는 부조리극이다

회사는 부조리극이다

아침 9시. 슬랙에 초록불을 켠다.
실제로 일할 준비가 됐다는 뜻이 아니다.
“나 있어요” 신호등일 뿐이다.

10시. 불필요한 회의에 참석한다.
카메라 켜라는데 안 켤 수도 없다.
화면 공유는 안 보고, 대신 마우스를 움직인다.
모니터링 소프트웨어가 내 근태를 체크하니까.

12시. 급하지도 않은 이메일에 5초 만에 답장한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 연기다.
Visier 조사에 따르면 미국 직장인 83%가 나처럼 산다(2023년 2월 설문).

이름 하여 생산성 연극(Productivity Theater).


극장은 어디에나 있다

회사가 부조리극이라는 건 새 발견이 아니다.
카프카가 《변신》에서 이미 말했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보니 벌레가 되어 있더라.
그런데도 회사 걱정부터 한다.

차이가 있다면 2025년 버전은 더 정교하다는 것.
슬랙 상태 메시지, 마우스 지글러, 시간 예약 이메일.
디지털 무대 장치가 잔뜩 있다.

Visier 보고서를 보면:

  • 응답자의 43%가 일주일에 10시간 이상을 연극에 쓴다
  • 즉 업무 시간의 25%가 “바쁜 척하기”다
  • 놀랍게도 재택 직원(25%)보다 사무실 직원(37%)이 더 연기를 많이 한다

왜 그럴까.
관객이 있어야 연극이 되니까.


무대 위 배우들

1막: 마우스 셔플

마우스를 계속 움직여서 화면을 깨워둔다.
마우스 지글러라는 기계도 있다.
손으로 흔들 필요도 없다. 자동이다.

왜 이럴까.
회사가 모니터링 소프트웨어로 키보드 입력, 마우스 클릭, 접속 시간을 추적하니까.
코로나19 이후 대기업의 생산성 추적 도구 사용이 60% 이상 증가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감시당하면 연기한다.
모니터링 도구가 있는 회사 직원이 그렇지 않은 회사보다 2~3배 더 많이 “가장 심각한 연극 행위”를 한다.
예를 들어 화면 깨워두기, 동료에게 일 떠넘기기, 진행 상황 부풀리기 같은 것들.

2막: 이메일 즉답

급하지 않은데 5초 만에 답장한다.
저녁 9시에 보낸 이메일에 9시 5분에 답한다.
“저 지금 일해요!” 신호다.

실제로는 저녁 7시에 미리 써놓고 시간 예약 발송한 거다.
슬랙 같은 플랫폼은 나중에 발송 예약 기능이 있다.
근무 시간 외에 동료 방해하지 않으려고 만든 기능인데,
연극 소품으로 쓰인다.

3막: 불필요한 회의

직장인이 가장 많이 하는 생산성 연극은 이메일 즉답, 시간 예약 발송, 그리고 불필요한 회의 참석이다.

내가 없어도 되는 회의.
안건도 모르겠고 내 할 말도 없는데 참석한다.
왜냐면 “협업하는 사람”으로 보여야 하니까.

회의 중에는 고개를 끄덕인다.
카메라 켜라고 하면 켠다.
화면 공유는 안 보고 다른 일 한다.


왜 이 연극을 하는가

이유 1: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

응답자의 64%가 이런 연기가 성공적인 커리어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절반 이상이 “매니저나 회사에 가치 있어 보이고 싶어서” 한다.

원격 근무가 늘면서 이 불안이 커졌다.
화면 너머에서 뭐 하는지 모르니까.
슬랙에 초록불 안 켜져 있으면 “저 사람 일 안 하나?” 의심한다.

마이크로소프트 팀즈나 슬랙 같은 도구는 언제 온라인인지, 얼마나 빨리 답하는지 추적할 수 있다.
안 보이면 안 일한다고 간주되는 시대.

이유 2: 해고 공포

2024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직장인의 절반 이상이 업무에 몰입하지 못하고 있다.
몰입 못 하면 생산성 떨어진다.
생산성 떨어지면 잘린다.

그래서 생산성 연극을 한다.
실제 성과는 안 나는데 바쁘게 보이려고.

응답자의 60%가 동료와 비교해 자신의 성과가 어떤지 걱정한다.
경쟁이다.
누가 먼저 잘리나 서바이벌.

이유 3: 스트레스

재정적 스트레스를 받는 직원은 일주일에 3시간 이상을 개인 재무 문제로 소비한다.
생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성과는 내야 한다.
실제로는 지쳤는데 괜찮은 척해야 한다.
그래서 연극한다.


연극의 아이러니

재미있는 건 이 연극이 실제로 생산성을 떨어뜨린다는 것.

평균 직장인은 하루 8시간 중 2시간 33분만 실제로 생산적으로 일한다.
32%다.
나머지 68%는 뭐 하나.
SNS 보고, 긴 점심 먹고, 폰으로 게임한다.
그리고 생산성 연극한다.

사무실 있는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심하다.
사무실 직원과 하이브리드 직원이 재택 직원보다 “바쁜 척 압박”을 더 느낀다고 한다.

왜냐면 관객이 바로 옆에 있으니까.
상사가 지나갈 때 엑셀 창 열고 있어야 한다.
“Look busy—the boss is coming!”


회사는 왜 이 연극장을 운영하는가

기업들이 모니터링 소프트웨어를 산다.
직원 마우스 클릭 추적한다.
키 입력 기록한다.
어느 사이트에 얼마나 있었는지 잰다.

G2의 직원 모니터링 소프트웨어 카테고리 리뷰가 2024년 8월 기준으로 전년 대비 48% 증가했다.
수요가 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연구에서는 재택 직원의 직무 만족도가 더 높았고, 스탠포드 연구에서는 하이브리드가 생산성에 영향 없었다고 한다.
또 다른 스탠포드 연구는 중국 기업에서 재택 근무가 성과 향상, 병가 감소, 이직률 감소를 가져왔다고 했다.

즉 데이터는 재택이 나쁘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그런데도 회사들은 사무실 복귀를 강요한다.
2022년 보잉, UPS, JP모건체이스 같은 회사들이 사무실 복귀 정책을 시작했다.
아마존은 최근 사무실에 충분히 출근하지 않는 직원과 일대일 면담을 진행했다.

왜 그럴까.
보이지 않으면 믿을 수 없으니까.
관리자도 생산성 연극 중이다.
“우리 팀 열심히 일해요” 연기.


연극을 멈추려면

해법 1: 명확한 목표

Visier의 Andrea Derler는 명확한 성과 관리 시스템이 없으면 사람들이 외부에 바쁜 척하려 한다고 말한다.

시간으로 재지 말고 결과로 재라.
이메일 몇 통 보냈는지 말고 뭘 달성했는지.
몇 시간 일했는지 말고 무엇을 만들었는지.

해법 2: 신뢰

자율성은 직장 생산성의 본질적 동인 중 하나다.
마이크로 매니징하지 말고 믿어라.
성과 목표가 무엇인지 명확히 하고 어떻게 할지는 맡겨라.

직원이 그 목표의 일부라고 느끼고, 자신의 역할과 그것이 왜 중요한지 알 때 신뢰가 생긴다.
신뢰하면 최선을 다한다.

해법 3: 심리적 안전

생산성 연극은 조직에 심리적 안전이 부족하다는 신호일 수 있다.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환경.
“일이 잘 안 풀려요” 라고 말하면 평가에 불이익 받는 곳.
그러면 연극한다.
“다 잘 되고 있어요” 가면 쓴다.

심리적으로 안전하면 진짜 문제를 말한다.
진짜 문제를 말해야 진짜 해결이 된다.


그런데

이 모든 걸 알면서도 우리는 계속 연극한다.
왜냐면 시스템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회사는 성과를 원한다면서 과정을 통제한다.
자율을 말하면서 출퇴근을 찍는다.
신뢰한다면서 화면을 감시한다.

모순이다.
부조리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의미 없는 대화를 반복한다.
고도(昇進? 성공?)는 오지 않는다.
그래도 내일도 나온다.


데이터 출처:

  • Visier 생산성 연극 설문 (2023년 2-3월, 미국 풀타임 직원 1,000명)
  • G2 직원 모니터링 소프트웨어 리뷰 분석 (2024년 8월)
  • 갤럽 2024 세계 직장 현황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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